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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2015.01.27) 시론-하청 노동된 돌봄의 사회화

돌봄희망터 2015-02-02 09:38:55 조회수 2,276
 
 
[시론]하청 노동된 ‘돌봄의 사회화’
 
 
 
권영숙 | 민주화를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노동위원장
 
 
보육노동을 사회화한다는, 꿈같은, 때로는, 사회주의적인 기획으로 여겨지는 일. 페미니스트들의 염원 같기도 한, 가사노동의 사회화 중 핵심을 차지하기도 하는 보육노동의 사회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구나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보육노동은 사회화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청노동으로 전가된다. 아니 용역 서비스 상품이 된다.

전통적으로 부모나 가족 성원이 사적 영역에서 맡았던 아동보육이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의 일부로 포섭되면서, 그것은 ‘노동’의 문제라는 덫에 빠진다. 아니 그냥 노동일 뿐이다. 보육에 노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묘한 형태의 노동, 즉 ‘돌봄노동’ 말이다. 게다가 학교라는 곳이 그 ‘돌봄’과 ‘양육’(보육)의 기능 일부를 맡는다면. 돌봄은 과연 복지문제인지, 교육문제인지, 노동문제인지 불분명해지는 영역에 놓이고 만다.

이렇듯 가사노동이 떠맡던 ‘보육’이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복지와 맞물려 변질되었다. 꿈꾸던 보육의 ‘사회화’가 아니라 노동으로, 그것도 위탁노동으로. 심지어 교육기관의 하청사업으로 전가되고 확장되었다. 근데 여기에는 어떤 사회적 합의가 있다기보다 도구적인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듯하다. 부모는 핵가족에서 자녀교육을 홀로 떠맡는 부담을 국가와 사회가 조금은 덜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복지의 확장 속에서 이를 교육체제의 연장이라는 미봉책으로 해결하려 한다. 정치권은 부모=유권자들의 요구에 직면해 숙려 없이 제도들을 이것저것 도입한다.

사실 인간 재생산, 아니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뜨거운 감자다. 어떻게 인간을 보육하고 교육하여 노동력으로 재생산하는가의 문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전히 논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게 문제다. 돌봄은 성별화된 노동, 즉 여성의 노동이었기에 여성의 일방적인 노동력 제공에 의지했고 ‘모성’담론으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이제 노동자가 보육을 떠맡는다고 해서 이전에 가사노동이었고, 사회적 부불노동이었고, 인정받지 못했던 보육의 기능이 사회적 가치를 월등하게 얻게 되지는 않는다. 보육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노동이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지불노동이 된 보육노동은 불안정노동이고, 저임금노동이고, 하층노동이다. 말하자면 성별 분업체계의 유제와 불안정노동의 이중질곡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돌봄 혹은 보육노동이다.

최근 임신 8개월된 보육교사의 돌봄아동 학대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나는 이 공분에 더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자신의 아이를 가정이 아니라 보육원에, 유치원에, 학교에 맡기는 부모는 얼마나 알까. 자신의 아이가 어떤 ‘돌봄’노동자의 손에 맡겨져 있는지? 그들 돌봄노동자, 혹은 교사가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노동조건하에서 자신의 아이를 ‘돌봄’노동하고 있는지? 정말 돌봄노동이 불가피하다면, 즉 부모의 돌봄노동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위탁하고, 나아가 이를 학교라는 장소에서 교육의 기능과 합치는 현 시스템이 불가피하다면 이제야말로 차분히 그들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들의 돌봄을 대행해주는 보육·교육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부모가 노동문제를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복지라는 차원에서 관심 가져야 할 이유다. 계약제 바지선장의 무책임과 부주의가 세월호 참사의 한 원인이었듯이, 아이들 돌보는 보육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 되기,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을 포함한다.